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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나의 슬로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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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나의 슬로건!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
  • 승인 2020.10.09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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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숙 신도보건진료소장.
▲ 임명숙 신도보건진료소장.

 학교를 졸업하고 나의 20대 초반 첫 일터는 매일 수많은 죽음을 마주 했던 중환자실에서의 간호사의 삶이었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가르는 환자와 예민한 보호자들과의 갈등 속에서 정신적 압박감과 야간 근무로 인한 육체적 피로로 지쳐갔던 시절 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함으로 내가 선택한 곳은 지역사회에서 1차 진료를 수행하는 곳 바로 보건진료소이다.

 30년 전 처음 발령받았던 27살부터 50대 중반을 넘기는 지금까지 진심어린 응원과 위로를 해주는 좋은 동료들과 가족같이 따뜻한 지역 주민들이 있기에 나에게 일터는 보람과 행복을 주는 곳이다.

 행복한 일터인 보건진료소에서 나는 80살을 훌쩍 넘는 어르신들께 1차 진료투약과 건강관리 상담 그리고 재가암환자 및 만성질환자 관리 등의 주된 업무를 수행하면서 종종 어르신들의 응어리 담긴 삶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곤 한다.

 진료실에 앉아 펑펑 눈물을 흘리시며 바로 자리를 뜨지 않으시더라도 나는 재촉하지 않는다. 평생 영감님과 살아오면서 힘들고 억압되었던 삶, 그녀(할머니)의 인생사를 눈물 흘리면서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고, 자녀들에게 느끼는 서운함 그리고 동네의 각종 소식들을 전해주시기도 한다. 이야기의 결말도 어르신이 다 내리시고 후련 하신 듯 내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가벼이 자리를 뜨신다.

 나는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예에~ 그랬구나예~” 공감 표시를 하며 들어드린 것뿐인데도 어르신은 스스로 억눌린 응어리가 풀려 마음 가벼이 돌아가시는 뒷모습을 볼 때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이렇게 나는 지역주민들의 고민 또는 모든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만능 상담사가 되어 간다.

 8, 90대 어르신들의 삶에는 성불평등, 남성들의 독단과 알코올로 인한 폭력행위 등으로 그동안의 억눌린 분노를 풀고 아쉬움을 달랠 대상자가 나와 같은 보건진료소장인 것이다. 가족 내 문제 등을 털어놓을 수 있는 비밀보장 확실한 상담자로서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이해하여 주리란 믿음으로 속내를 편안히 털어 놓는 듯하다.

 지역사회에서 세대를 아우르며 마을의 건강지킴이 역할을 하는 지금 나는 보람차고 행복하다.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마을로 발령받고 새로운 지역주민을 만나서 시작할 때면 마음 설렌다.

 비록 갑작스럽게 찾아온 코로나19로 전 국민은 물론 우리 마을 어르신들께 많은 변화와 불편함을 가져다주었다. 어르신들의 일상생활 즐거움인 경로당 식사모임 등 주민들과 함께하는 활동을 할 수 없어 답답해하시지만 그래도 자연을 벗 삼아 건강하게 텃밭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제주에서만의 특혜이며 이것이 행복이라 말씀하신다.

 보건진료소에서 해마다 지역 주민과 체조교실을 운영하고 걷기활동을 함께하며 울고 웃으며 지내왔던 것들이 새삼 그립다. 코로나19로 멈춰버린 여러 활동들이 내년에는 제대로 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과거의 소중한 경험들이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가 되기를 바란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만들어내고 행복을 찾아가는 우리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현장에서 나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앞으로 남은 재직기간도 “당신(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립니다.” 라는 슬로건으로 지역사회에서 주민들이 “건강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할 것이다.

 행복이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느끼는 것이리라. 앞마당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뒷마당 과수원의 귤꽃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코를 통해 마음을 열면 만천하가 아름답게 보이리라. 이것이 바로 행복임을 나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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