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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제주여성〕시대의 선구자 강평국 아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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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 - 제주여성〕시대의 선구자 강평국 아가다(1)
  • 승인 2019.07.0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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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제주교구 주보 3·1운동 100주 특집 전재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제주 최초 유학생·여교사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강평국, 고수선, 최정숙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은 어린 여학생이었으나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애국심과 제주여성의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르며 서울 거리를 누비던 이들의 발자취를 강평국, 고수선, 최정숙 순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가톨릭 제주'에 연재된 글의 전재를 허락해 주신 천주교제주교구 사목위원회에 감사드립니다.
▲ 강평국(姜平國 1900∼ 1933).

 불같은 성격의 항일 운동가이자 제주 최초의 여교사였던 강평국은 1900년에 제주교안에 순교한 아버지 강두훈과 어머니 홍소사 유리안나의 3녀로 태어났는데, 본관은 진주. 본명은 강년국(姜年國)이며 세례명은 아가다이다. 나라를 되찾아 평화를 앞당겨야 하겠다는 염원으로 이름까지 바꾼 선구자 강평국의 삶을 되돌아본다.

 교육열이 지극했던 어머니는 영민했던 평국을 1910년 구마술 신부가 설립한 신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일반교과 뿐만 아니라 교리와 기도 등을 공부하며 천주님을 영접했고, 졸업 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 본과를 거쳐 사범과에서 공부했다. 고수선과 최정숙이 편입하는 바람에 동급생이 되어 같이 기숙사에서 머물며 공부하던 중 민족대표 33명 중의 1인인 박희도가 조직한 79소녀결사대에 가입해 활동했다.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와 함께 경성교보에 다니던 제주출신 박규훈을 통해 만세운동에 대한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강평국은 몸이 작아 식모방 창문을 넘어가 박규훈으로부터 연락을 받는 등 외부 연락을 담당했다. 3.1운동이 일어난 날 아침, 독립선언서가 운동장에 뿌려지고 선생님들이 교문을 잠가버리자 소녀결사대와 함께 교문을 부수어 뛰쳐나간 평국은 군중 틈에 끼어 종로경찰서를 거쳐 서울역, 용산서를 거쳐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이 총을 쏘자 세브란스 병원에 피신하여 구속은 면했다.

 이튿날 32명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가 강평국은 10여명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풀려났고, 최정숙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을 때는 고수선과 함께 반찬을 만들어 사식으로 넣어주기도 하고 반찬속에 편지를 넣어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기도 했다.

 일본 국가를 부르는 졸업식에 참가하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한 최정숙과 같이 제주로 내려왔는데 담임이 졸업장과 교사자격증을 보내주었다. 전라남도 진도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가 당시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초)를 졸업하고 경성고보와 부설 사범과를 졸업한 후 대정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오빠 강세독의 권유로 제주로 내려와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제주공립보통학교로 옮겨 근무하면서 최정숙과 함께 여자장학회를 토대로 1921년 강습소인 여수원을 설립, 50명이 공부를 했는데 남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명신학교로 통합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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