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17:59 (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들을 향하여”
상태바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들을 향하여”
  • 승인 2019.07.01 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순이 시인 시선집 '제주야행' 발간

 김순이 시인(73)이 두 번째 시선집 《제주야행》을 펴냈다.

 시인은 말한다. “시골로 이사온 지 5년, 새소리가 아침잠을 깨우고 어느 문을 열어도 초록세상이 안겨온다. 두말없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들과 함께 지낸다. 민들레 채송화 산수국 쑥부쟁이 노랑어리연꽃…… 이들과 눈 맞추며 사는 나에겐 오늘 하루가 시다”라고.

 하루가 시 자체인 김순이 시인이 펴낸 시선집《제주야행》은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를 비롯해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을 향하여’, ‘미친 사랑의 노래’, ‘초원의 의자’, ‘오름에 피는 꽃’ 등 5부로 구성해 50편의 시를 추려 담아내었다.

 교래들판을 지나갈 때는 방자한 바람, 미친 듯한, 거침없는 바람이 되어 산안개 몰아서 조랑말떼로 달리게 하리라는 시인의 의지라든지(시 ‘교래들판을 지나며’) 발을 씻으며 나도 풍란의 발을 떠올리는 동시에 때 묻은 마음을 벗기도(시 ‘발을 씻으며’) 한다.

 성산의 햇살에서부터 한라산, 선작지왓, 대포해안, 배릿내, 제주바다, 마라도, 서귀포 등 자연이건 도시이건 그의 눈길에 포착되어 어김없이 시가 있는 하루로 들어앉는다. 매양 바라보는 제주수선화를 비롯해 야생란, 산수국, 동백, 돌매화꽃, 엉겅퀴 꽃, 억새 같은 벗들에게서는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 때로 야생의 삶을 마주치기도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 피가 맺히는 사랑을(시 ‘엉겅퀴 꽃’).

가장 쓸쓸한 바람이 살고 있는
이 고원高原에
한 가지 소원을 묻어두었다
산 넘어가는 구름
걸터앉아 쉬는 바위틈마다
봄눈 속에 피어난 산진달래
꿈에도 보인다
그 팍팍한 슬픔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이름없는 것들이
열심히 피고 지는 까닭에
세상은 아직도 아름답다는데
가장 소중한 것
가슴에 묻어도
슬며시 빠져나와 깊은 잠 흔드는
더 이상 쓸쓸할 수도 없는
이곳에서
또 한세상 살아가리라
그리움의 발길 헤매리라

 - 시 ‘선작지왓’ 전문

 슬픔과 쓸쓸함의 극치에서 ‘또 한 세상 살아가리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기다림, 희망은 처절한 삶의 아름다움을 ‘선작지왓’이라느 풍경으로 치환해 시각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허상문 교수(영남대)는 시집 해설을 통해 “고통받는 자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슬픔으로 무너져본 자만이 슬픔의 연대에 의해 솟아나는 진정한 희망을 지닐 수 있다는 믿음을 시인은 지니고 있다”고 평한다.

 이어 허 교수는 “희망은 고통과 슬픔이 서로 부딪히고 끌어안으며 서로를 향해서 열리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김순이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며 “이렇게 김순이 시는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희망과 기쁨을 양각陽刻시킨다. 고통과 슬픔은 상처의 다른 이름이지만, 그는 이 상처를 사랑한다. 상처는 고통과 슬픔을 부르지만, 그 고통은 사람을 아름답게 한다. 이때에야 비로소 어둠은 빛을 발하고 슬픔은 희망으로 부활한다”고 보았다.

 시인 김순이는 1946년 제주시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계간 <문학과비평>에 시 ‘마흔 살’ 외 9편으로 등단했다. 그동안 시집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을 항하여》, 《미친 사랑의 노래》등 다수가 있으며, 1996년 시선집 《기억의 섬》을 펴냈다. 1970년 퇴직한 이후 제주도문화재감정관과 제주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2014년,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직을 사임하고 성산읍 난산리로 거주지를 옮기고, 그의 표현대로라면 '자연과 더불어 꽃을 가꾸며 마음껏 책과 벗하며' 지내고 있다.

 김순이 시인은 지난 2009년 제주예술인상, 덕산문화상, 2017년 문화재청장 표창 등을 받았다.

 황금알 刊. 168p. 책값 15,000원.


주요기사
이슈포토